밤의 끝에서 우리가》
– 중년의 두 사람, 인생의 끝자락에서 나누는 100개의 새벽 대화 –
6편 사랑의 잔향
“사람 마음은 참 묘해요.
다 끝났다고 생각한 사랑이,
가끔 바람결에 다시 스쳐요.”
“그게 잔향이지.
불은 꺼졌는데, 연기는 남는 거.”
“그 연기 냄새가, 이상하게 안 지워져요.”
“그게 사랑의 진짜 냄새일지도 몰라.”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준호는 조용히 그 표정을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밤이었다.
7편 자식이라는 이름의 타인
“아들은 요즘 어때?”
“잘 살아요. 근데 가끔은 내가 걔 엄마였던 게 맞나 싶어요.”
“자식은 결국, 세상으로 가버리는 사람이지.”
“그래도 내가 힘들 땐 걔 생각이 나요.
나를 잊었을까봐 겁이 나요.”
“잊지 않았을 거야.
다만, 자기 인생을 사느라 바쁠 뿐이야.”
“그게 서운해요.”
“서운함은, 사랑이 남아 있다는 증거야.”
8편 기억의 그림자
“기억이란 게 잔인한 게,
좋은 기억도 오래되면 아파요.”
“그건 추억이 아니라, 미련이 돼서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잊을 수 있을까요?”
“잊지 말아야지.”
“잊지 말아요?”
“그래야 덜 아파.
억지로 잊으려 하면, 자꾸 떠올라.”
서윤은 웃었다.
“당신 말 참 모순이에요.”
“인생이 원래 모순이잖아.”
9편 술과 고백 사이
“요즘은 술이 좀 세졌어요.”
“이제는 취하려고 마시잖아.”
“맞아요. 예전엔 즐기려고 마셨는데.”
“그럼 오늘은 나도 좀 마셔볼까.”
“고백할 거 있어요?”
“글쎄, 마시면 생길지도 모르지.”
그들은 그렇게 웃었다.
그 밤, 두 잔의 위스키가
서로의 오래된 벽을 조금 녹였다.
10편 가을의 문턱에서
“가을은 참 잔인하죠.
모든 게 예뻐지면서 죽어가잖아요.”
“그래서 사람 마음이 흔들리는 거야.
예쁘게 끝나는 게 제일 어렵거든.”
“우리도 그렇게 끝낼 수 있을까요?”
“아직 끝난 것도 아니잖아.”
그날 서윤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가로수 잎이 떨어지며
조용히 계절을 바꿨다.
11편 편지
며칠 뒤, 준호는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탁자 위에 봉투 하나를 올려뒀다.
“이게 뭐예요?”
“그냥, 오래된 마음 하나.”
서윤은 편지를 천천히 폈다.
몇 줄의 문장.
‘그때 말하지 못했던 사랑을,
이제야 보내요.’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12편 용서의 연습
“사람을 용서하는 건 참 어려워요.”
“그래서 나이 들어도 다들 서툴지.”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미워해요.”
“근데 미워한다는 건 아직 마음을 준다는 거야.”
“그럼 언제쯤 미움도 끝날까요?”
“미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냥 힘이 빠지는 거지.”
그날 밤, 서윤은 집으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힘이 좀 빠져도 괜찮겠다.”
13편 시간의 얼굴
“준호 씨, 요즘 거울 봐요?”
“아침마다 봐.
근데 낯선 사람이 나를 보더라.”
“그게 나이죠.”
“아니, 그게 시간이지.”
둘은 웃었지만, 그 웃음엔 슬픔이 섞였다.
“우리, 참 오래 버텼네요.”
“응. 근데 버틴다고 사는 건 아니더라.”
14편 봄의 흔적
“봄이 오면 이상하게 외로워요.”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
“응. 근데 시작할 힘이 없어요.”
“그럼 그냥 피어나는 걸 바라봐.
그것도 봄이니까.”
서윤은 커피잔을 감싸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바라보는 봄… 그게 나한테 어울리네요.”
15편 사람의 무늬
“사람은 변해요?”
“변하지. 근데 방향이 문제지.”
“나는 예전보다 조금 단단해졌어요.”
“난 조금 부드러워졌고.”
“그럼 이제 서로 맞을지도 몰라요.”
준호는 웃었다.
“이제 와서?”
“이제라도.”
16편 어제의 우리
“사진관 정리하려고요.”
“왜요?”
“손님도 없고, 기억이 너무 많아요.”
“기억이 많으면 좋은 거잖아요.”
“그게 문제예요.
매일, 어제의 내가 나를 쳐다봐요.”
“그럼 어제의 나한테 인사해요.”
“안녕, 어제의 나.”
그날 준호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17편 이별의 리허설
“요즘은 자꾸, 당신이 없는 날을 상상해요.”
“벌써 이별 연습이에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나이라서요.”
“이별은 예고한다고 덜 아픈 게 아니야.”
“그래도… 준비는 해야죠.”
그날 밤, 둘은 평소보다 천천히 인사했다.
서윤은 돌아서며 말했다.
“오늘은 헤어짐이 덜 무겁네요.”
“그건, 이미 익숙해져서 그래.”
18편 병실의 창가
서윤이 아팠다.
급한 건 아니지만,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준호는 매일 새벽 찾아왔다.
“왜 말 안 했어요.”
“걱정하게 싫어서요.”
“걱정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에요.”
그날 병실 창가엔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빛을 같이 바라봤다.
19편 살아 있다는 일
“살아 있다는 건,
이렇게 누가 날 기다리는 거네요.”
“그리고 누가 걱정해주는 일이지.”
“그게 사랑일까요?”
“글쎄.
사랑이란 말이 꼭 필요할까.”
그날 준호는 서윤의 손을 잡았다.
말보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20편 노을의 자리
퇴원한 날, 둘은 오래전부터 가던 바닷가로 갔다.
노을이 바다 위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 노을, 언제 봐도 익숙하면서 낯설어요.”
“우리가 그런 사이잖아.”
“그럼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까요.”
“노을이 완전히 질 때까지는.”
바람이 불었다.
바다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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