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냄새가 진하게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가을 냄새가 진하게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바람은 부드럽게 코끝을 스치고, 낙엽은 아스팔트 위에서 바스락거리며 발끝을 간질였다. 윤서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너 요즘 표정이 왜 그래?”
민호가 옆에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조용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읽는 힘이 있었다.

“표정?” 윤서는 피식 웃었다. “그냥, 사는 게 좀 그렇지.”

“사는 게 그렇다니?”

윤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도로 위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목적이 뭐였는지도 잊은 것 같고.”

민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건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 같았다.

“근데 있잖아.” 윤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후회 같은 거 있어?”

민호가 웃었다. “있지. 너한테 말 안 했던 거.”

“뭔데?”

“그때, 네가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있잖아. 나는 왜 그렇게 바보같이 ‘나중에 보자’고 했을까. 그 한마디가 아직도 남아.”

윤서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게… 네가 좋아서 그랬던 거야?”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꺼낸 손을 머리 뒤로 넘기며 허공을 바라봤다. “좋아했다는 말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냥, 그땐 네가 너무 멀게 느껴졌어.”

윤서는 살짝 웃었다. “나는 오히려 그때가 제일 가까웠던 것 같았는데.”

그 말에 민호가 그녀를 바라봤다. 바람이 윤서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순간,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럼 지금은?” 민호가 물었다.

“지금은…” 윤서는 잠시 생각했다. “이제는 그냥, 네가 옆에 있는 게 좋아. 복잡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니까.”

민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면 충분하네.”

그들은 다시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시간이 있다는 걸.

길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윤서가 갑자기 멈췄다. “있잖아, 나 내일 회사 그만둘까 생각 중이야.”

민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그냥…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내 인생인데, 남들이 정해놓은 길만 걷는 느낌이야.”

“그럼 뭐 할 건데?”

“아직 몰라. 그냥 쉬고 싶어. 그리고 언젠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찾아보고 싶어.”

민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내가 네 옆에서 걸어줄게. 네가 멈춰 있든, 어디로 가든.”

윤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그 말… 기억해. 나중에 도망가도 잡으러 와야 돼.”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그들은 다시 길을 걸었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따뜻했다.
멀리서 버스가 지나가며 불빛이 스쳤고, 윤서는 그 빛 속에서 민호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의 눈빛엔 여전히 조용한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윤서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결국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든, 얼마나 멀리 가든.

바람이 그들의 대화를 데려가며, 낙엽은 여전히 바스락거렸다.
그들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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