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끝에서 우리가》
21~50편 : 인생의 전환점들
21편 봄날의 기차
“혼자 여행 가본 적 있어요?”
“없지. 누군가를 찍어야 사진이 완성되는 사람인데.”
“이번 봄엔, 그냥 떠나요. 아무 계획 없이.”
“혼자?”
“혼자라도 괜찮아요. 아니, 혼자여야 해요.”
그날 준호는 오랜만에 기차표를 끊었다.
목적지: 아무 데도 아닌 곳.
그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혼자 가는 게, 누군가와 함께였던 기억을 비우는 일이구나.”
22편 길 위의 풍경
준호는 여행지에서 작은 마을을 거닐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웃으며 인사했다.
“여행 오셨나 봐요?”
“예, 그냥… 생각 좀 하러요.”
밤에 서윤에게 문자가 왔다.
‘그쪽 하늘은 어때요?’
‘별이 많아. 근데 별빛보다 당신 생각이 더 선명해.’
답장은 한참 후에 왔다.
‘그럼 조금만 더 머물다 와요.’
23편 귀향
며칠 후 준호는 돌아왔다.
카페 문을 여니 서윤이 앉아 있었다.
“잘 다녀왔어요?”
“응. 근데 이상하게… 돌아오니까 편해.”
“사람은 결국 돌아올 곳이 필요하죠.”
“그게 꼭 집일 필요는 없겠지.”
“그럼요. 누군가의 마음이면 충분하죠.”
24편 서윤의 소식
“나 이번 달에 부산 내려가요.”
“왜?”
“엄마가 편찮으셔서요. 한동안 거기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준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가끔 내려갈게.”
“굳이요?”
“굳이, 라는 말이 제일 외로운 말이야.”
그날, 그들은 함께 있던 카페 불빛을 오래 바라봤다.
25편 어머니의 방
부산의 작은 병실.
서윤은 어머니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엄마, 많이 힘들죠.”
“아니야. 이제는 그냥… 다 놓고 싶다.”
밤에 준호가 전화를 걸었다.
“괜찮아?”
“몰라요. 나 이제 어른이 된 기분이에요.”
“이제서야?”
“응. 부모 잃을 준비를 하니까, 진짜 어른이 되네요.”
26편 장례 후
며칠 뒤, 장례가 끝났다.
준호는 버스정류장에서 서윤을 기다렸다.
“엄마가 마지막에 내 손을 꼭 잡았어요.
그 손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인생이야.
사라져도 남는 게 있거든.”
그날, 서윤은 처음으로 준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27편 도시의 빗소리
다시 서울로 돌아온 서윤은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전화가 왔다.
“준호 씨, 그냥 목소리 듣고 싶었어요.”
“괜찮아졌어?”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그냥… 버티는 중이에요.”
준호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게 가장 큰 위로였다.
28편 아들의 결혼식
“이번 주말에 아들 결혼해요.”
“벌써?”
“응. 나보다 훨씬 단단해 보여요.”
“기분이 어때?”
“이상해요. 내 인생의 주인공이, 이제 다른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엄마의 졸업이지.”
“그럼 나 이제 뭐해요?”
“당신 인생을 다시 시작하면 돼.”
29편 빈집
결혼식이 끝나고 돌아온 집.
서윤은 조용히 웃었다.
“이제 진짜 혼자네요.”
“혼자라는 게 그렇게 무서워?”
“무섭다기보단… 소리가 너무 커요.”
“어떤 소리?”
“내 숨소리요.”
준호는 말했다.
“그 소리가 들린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야.”
30편 준호의 초대
“우리 동해로 가요.”
“갑자기?”
“그냥, 보고 싶은 바다가 있어서.”
그들은 새벽길을 달려 동해에 닿았다.
아무 말 없이 모래 위를 걸었다.
“준호 씨.”
“응.”
“이렇게 조용한 게… 좋네요.”
“그래. 이건 우리가 살아온 세월의 소리야.”
31편 새벽의 불빛
바닷가에서 둘은 모닥불을 피웠다.
“당신은 아직 사진 찍어요?”
“가끔.
이젠 사람보다 빛을 찍는 게 좋아.”
“왜요?”
“빛은 변하지 않으니까.”
“사람도 변하지 않아요.
다만, 보여주는 얼굴이 바뀔 뿐이에요.”
그 말에 준호는 카메라를 들어 그녀를 찍었다.
오래 묵은 마음이 셔터 소리와 함께 남았다.
32편 편지 두 번째
며칠 후, 서윤은 봉투 하나를 받았다.
‘동해의 밤, 당신의 눈빛이 참 따뜻했어요.’
짧은 문장이었다.
그녀는 그 편지를 책갈피처럼 꽂아두었다.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33편 아픈 계절
서윤의 검진 결과가 좋지 않았다.
“괜찮다고 했잖아.”
“괜찮아요. 아직은.”
“서윤아, 나 겁난다.”
“나도요. 근데 겁난다고 피할 순 없잖아요.”
그날 이후 준호는 매일 카페에 나왔다.
서윤이 오지 않는 날에도, 자리를 비워두었다.
34편 그리움의 형태
“그리움은 모양이 있어요.”
“어떤 모양?”
“당신 얼굴 같아요.”
준호는 말없이 웃었다.
그날 밤, 그는 카메라를 들고 하늘을 찍었다.
별 하나, 둘… 그리고 눈물 하나.
35편 여름의 끝
서윤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그래도 무리하지 마.”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건 처음이에요.”
준호는 말했다.
“살아 있다는 건,
서로를 걱정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36편 이사
“집을 옮기려고요.”
“왜?”
“엄마의 그림자가 너무 남아 있어서요.”
“그럼 새로운 기억을 채워야겠네.”
“그게 두려워요.
새로운 건 항상 끝을 데리고 오잖아요.”
준호는 웃었다.
“그래도 시작은, 늘 아름답지.”
37편 친구의 장례식
준호의 대학 동기가 세상을 떠났다.
“이젠 하나둘씩 줄어드는 나이야.”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운 거죠.”
“서윤아,
죽음이란 게 멀리 있는 게 아니더라.”
“그러니까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인 거예요.”
그날,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살아 있음이 순간의 축복임을 느끼며.
38편 가을, 다시
“가을은 또 오네요.”
“그게 자연이지.”
“근데 사람 마음은,
그만큼 단단해지지 않아요.”
“단단해지는 건 나무고,
사람은 그냥 투명해지는 거야.”
“투명해진다는 건?”
“서로의 속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지.”
39편 서윤의 그림
“요즘 그림을 그려요.”
“그림?”
“엄마가 쓰던 붓으로요.”
“무엇을 그려?”
“당신이 앉던 자리요.”
준호는 말을 잃었다.
그림보다 더 선명한 그 마음에.
40편 겨울의 초입
“눈이 오네요.”
“응. 눈 오는 날은 꼭 당신 생각이 나.”
“왜요?”
“눈처럼 조용해서.”
그날, 카페 유리창에 내리던 눈송이가
서윤의 눈물처럼 흩어졌다.
41편 재회
한동안 서윤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기다렸어요?”
“매일.”
“그 말… 듣고 싶었어요.”
그날 밤, 그들은 오래도록 손을 잡았다.
모든 시간의 틈이 하나로 이어졌다.
42편 첫 여행, 함께
“이번엔 같이 여행해요.”
“좋지. 어디로?”
“전라도.
엄마가 젊을 때 좋아하던 바다요.”
그들은 그 길을 따라 내려갔다.
바람이 부드럽고, 기억이 따뜻했다.
서윤은 중얼거렸다.
“이제서야, 마음이 집에 가는 기분이에요.”
43편 바다 위의 약속
“이 바다는 오래됐네요.”
“우리처럼.”
“그럼 우리도 오래가야죠.”
준호가 웃었다.
“그건… 약속이야?”
“약속이라기보단, 기도에 가까워요.”
44편 사진 한 장
준호는 서윤을 바다 앞에 세웠다.
“하나, 둘, 셋.”
셔터 소리.
“이번엔 나도 찍어요.”
“왜?”
“같이 있어야 완성되죠.”
그날의 사진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게 이어져 있었다.
45편 편안한 침묵
“요즘은 말 안 해도 좋아요.”
“응. 조용한 게 더 따뜻하더라.”
“젊을 땐 그렇게 말이 많았는데.”
“그땐 말로라도 붙잡고 싶었겠지.”
이제는,
침묵조차 사랑이었다.
46편 서윤의 생일
“오늘 내 생일이에요.”
“알지.”
준호는 케이크를 꺼냈다.
“언제 준비했어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어.”
촛불을 끄며 서윤이 말했다.
“이제는 소원 안 빌래요.
그냥, 오늘이 고마워서.”
47편 병의 그림자
서윤의 병이 다시 재발했다.
“괜찮아요.
이번엔 덜 무서워요.”
“겁나면, 내가 옆에 있을게.”
“있어주는 게 제일 고마워요.”
그날 준호는 병원 복도에서
하염없이 노을을 바라봤다.
48편 겨울의 침묵
눈이 내리던 날,
둘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준호 씨.”
“응.”
“내가 없어도, 사진은 계속 찍어요.”
“그건… 너무 어려운 부탁이야.”
“그래도 약속해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테니까.”
49편 마지막 바람
서윤은 점점 기운이 약해졌다.
“준호 씨,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나요?”
“잊은 적 없어.”
“그럼 됐어요.
사람은 기억 속에서 오래 살면 되니까.”
그녀의 눈이 감겼다.
조용히, 따뜻하게.
50편 노을 끝에서
준호는 바다로 갔다.
그날,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하늘을 찍었다.
“서윤아, 이 빛 봐.
너 같은 색이야.”
그는 미소 지었다.
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노을은 그렇게 저물고,
밤이 깊어졌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아직, 깨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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